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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차별에 '연대'로 맞서다, '실비아 팽크허스트'

조회수 2016. 11. 18. 17: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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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뿐 아닌 만인의 정치적 권리 실현을 꿈꿨던 영국 여성운동가

먼저, 영화 한 편 보고 이야기할까요.

얼마 전 상영된 영화 '서프러제트'.

영화는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을 배경으로 했는데요. 서프러제트(Suffragette)란 참정권을 가리키는 'Suffrage'에서 나온 말로 여성 참정권 운동가를 뜻합니다.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메릴 스트립은 이 조직의 전설적 지도자, '에멀라인 팽크허스트'를 연기했는데요. <한겨레21> '20세기 사람들'에서 만나볼 첫 번째 인물은 바로 '에멀라인 팽크허스트'의 둘째딸 '실비아 팽크허스트'입니다.

출처: 위키백과
여성 참정권론자,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2).


실비아 팽크허스트(1882~1962)


본래 온건사회주의자였던 에멀라인 팽크허스트.

그러나 사회주의, 노동운동 단체들마저 여성 선거권 도입에 나서지 않자 그는 여성 연합을 결성해 참정권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에멀라인 뿐 아니라 그의 세 딸들까지, 온 가족이 이 운동에 몸을 던졌는데요.


그들은 기득권 남성들의 반대가 완강할수록 공공시설 파괴 같은 테러 전술을 채택하는 둥 치열한 실천을 벌입니다. 또여성 선거권 문제에 기대만큼 부응하지 않는 노동 세력을 적으로 돌렸죠.

하지만 에멀라인의 지도 노선과 좀 다른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즉각적인 여성 선거권 보장에는 뜻을 함께 하되 이를 위해 노동운동과 연대해야 한다는 흐름이었는데요. 놀랍게도 이 흐름을 주도한 인물은 에멀라인의 딸 중 하나인 실비아 팽크허스트였습니다. 

출처: 한겨레21(UPI코리아 제공)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여성뿐만 아닌 만인의 완전한 정치적 권리 실현을!

사실 실비아 팽크허스트는 언니 크리스타벨과 달리 미술학도의 길을 걷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의 급박한 현실이 그녀를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1905년 어머니 에멀라인을 비롯한 여성연합 집행부가 체포되자 실비아는 임시 조직을 꾸려가기 위해 명예 사무총장직을 떠맡게 됩니다. 불과 23살의 젊은 나이였죠.

출처: 월간 <오늘보다>
여성사회정치연합의 포스터.

에멀라인과 크리스타벨은 여성 선거권의 강조가 지나쳐서 다른 사회문제는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실비아는 어머니와 언니의 짐을 덜어주고자 조직에 관여했지만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어머니와 언니의 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게 됩니다.

실비아는 '여성뿐만 아니라 만인의 완전한 정치적 권리 실현'이 여성 참정권 운동의 목표가 돼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당시에는 재산세 납부액이 일정 기준을 넘지 못하는 남성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참정권이 없었는데요. 즉, 상당수 남성 노동자 또한 정치에서 배제된 상태였던 것입니다.

출처: 한겨레21(가디언 누리집 갈무리)
1912년 영국 런던 트래펄가 광장에서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잡힌 실비아 팽크허스트(왼쪽 세번째).

물론 실비아도 여성 선거권 쟁점에 미온적인 노동당, 노동조합 지도부에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여성운동이 노동운동에 손을 내밀어 보통선거제도 쟁취를 위해 함께 투쟁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둘의 연대가 가장 빛을 발하는 곳은 여성 억압과 노동 착취가 교차하는 여성 노동자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비아와 동지들은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 회원을 늘리려고 노력했죠.

그렇게 1912년, 노동자 밀집 지역인 런던 동부에 처음으로 여성연합 지부가 결성됩니다. ‘동런던서프러제트연합’(ELFS, 이하 동런던연합)이라 불린 새 지부는 본부와 달리 실비아의 노선에 따라 참정권 운동을 펼쳤습니다.


출처: 월간 <오늘보다>
1911년, 런던 서프러제트 행진.


'제한 없는' 선거권 도입과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선 실비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인 1914년 6월.

동런던연합 활동가들은 하원의사당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자유당 소속 허버트 애스퀴스 총리는 동런던연합 대표단과 면담하며 “제한 없는” 선거권 도입을 검토하겠다고 답했는데요. 정권으로부터 “제한 없는” 선거권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폭발물 투척에는 끄떡없던 정부도 파업과 결합된 끈질긴 대중 시위에는 다른 태도를 보인 것입니다. 실비아와 동런던연합 노선의 승리였죠. 그러나 갑자기 닥친 전쟁으로 모든 개혁논의가 돌연 중단되고 맙니다.

갑자기 닥친 전쟁으로
모든 개혁논의가 돌연 중단.

애국주의 광풍이 불던 개전 초기에는 사회운동도 숨죽이며 사태를 주시해야 했습니다. 에멀라인과 크리스타벨은 참정권 운동을 전후 과제로 미룬 채 정부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했지요. 


실비아는 이번에도 이들과 정반대 길을 택합니다. 동런던연합은 노동자참정권연합(WSF)으로 이름을 바꾸고 반전운동에 나선 것이죠. 


192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당이 집권하게 됩니다. 파시즘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최대 위협임은 나중에 분명해졌습니다만 실비아는 1920년대부터 반파시즘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출처: 위키백과
반파시즘(Anti-fascism)는 약 1980년대 초반부터 다시 확산된 안티파시즘 (Antifaschismus)과 안티파 행동(Antifaschistische Aktion) 이라는 용어의 약어. 이미지는 현대 안티파의 로고.


신문 통해 에티오피아 참상 알려


파시즘에 맞서면서도 실비아의 눈길이 향한 곳은 많은 이들과 달랐습니다. 실비아가 첫 번째 연대 대상으로 주목한 곳은 1935년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의 침략을 받은 에티오피아였습니다. 스페인과 에티오피아 모두 똑같은 파시즘의 희생양이었지만 스페인과 달리 에티오피아는 관심 바깥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비아는 예외였죠.

출처: 씨네 21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새 시대와 에티오피아 뉴스> 신문 창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 영감 이끌어내

실비아는 1936년 <새 시대와 에티오피아 뉴스>라는 제호로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오로지 에티오피아인들의 참상과 투쟁을 세계인에게 전달하는 게 목적인 신문이었죠. 이 신문은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과 범아프리카주의의 영감을 이끌었고, 훗날 케냐의 반영국 독립투쟁을 이끈 조모 케냐타나 가나의 초대 대통령 콰메 은크루마도 신문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실비아는 에티오피아 연대 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60년 사망 후 실비아의 유해는 에티오피아에 묻혔죠. 지금도 그녀의 동상은 런던 동부의 한 공원에 있지만, 무덤은 에티오피아의 애국선열 묘역에 있습니다.



21세기가 닮아야 할 '연대' 정신


자결권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은 하나

오늘날 ‘연대’는 멸종위기종입니다.

대중에게 생존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누구나 다 자기가 남보다 더 고통받는다고 강변하는 데 익숙해졌지요.


하지만 실비아에게는 달랐습니다.

그녀에게는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가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21세기에 무한 복제돼야 할 삶이 아닐까요.

글/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편집 및 제작/ 배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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