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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지배받을 수 없다며 자결 순국 선택한 '이 부부'

조회수 2019. 8. 31. 13: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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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자결 순국 사례로는 유일하다.

* 2009년 2월 26일 작성된 입니다. 

▲ 유족들이 공개한 문서 자료들. <성재옹유고>, 부조록 등

20세기 벽두에 대한제국이 그 명운을 다해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망국의 아픔과 통한을 가누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이 있다. 정작 이씨 성의 왕족 가운데는 그 책임과 죄업을 진 이가 없으나 이들은 스스로 왕토에 사는 신민의 도리를 다했다. 이들 자정 순국 지사 70여 분 가운데 열 분이 경상북도 안동 사람이다. (관련 글: 장엄하여라, 우국의 황혼이여


그들은 곡기를 끊고, 독약을 마시고,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그 죽음은 확신을 통해 이뤄지지만, 그 행위의 결과가 특정한 성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한목숨의 절멸일 뿐 물리적으로는 적의 터럭조차 건드리지 못하니 그 죽음은 자기 존재의 전부를 버리는 고독한 선택이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면서 시간과 더불어 전개되지만, 스스로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것을 기록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역사를 기록하는 인간의 눈길을 그리 넓거나 멀리 미치지 못한다. 자결 순국한 모두 10분의 지사 중에서 역사의 기림은커녕 이름만이 간신히 알려진 이가 이명우·권성 부부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선생이 안동 예안 출신이며 고종의 사망 소식을 듣고 아내와 함께 독약을 먹고 순절했다는 것이다. 자료의 부족으로 출생 연도도 전하지 않을 만큼 잊혔던 이들의 순국은 2009년 무렵 두 분의 유서가 발견됨으로써 빛을 보게 됐다.

고종 탈상 후 자결 선택한 이명우 선생

2009년 2월 25일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는 3·1 만세운동 90주년을 맞으며 이들 후손의 기자회견을 주선하고 이명우·권성 내외분의 순국 과정, 사후 장례 관련 내용, 유서들을 소상하게 밝혔다. 자료를 공개한 이는 이명우 선생의 손자 이일환 씨 등 유족들. 유서는 집안에 보관하고 있던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됐다.

▲ 안동 독립운동기념관장 김희곤 교수가 유서를 설명하고 있다.

성재 이명우(1872~1921) 선생은 안동 예안면 부포마을에서 퇴계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14세에 봉화 닭실(유곡)마을의 안동 권씨 권성( 1868~1920)과 혼인했다. 그는 1894년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 진사가 됐으니 마지막 과거에 급제했던 전통 유림의 마지막 세대였던 셈이다.


이듬해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를 당하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칩거에 들어갔다. 1910년 끝내 나라가 망하자 그는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려 했으나 아직 부모가 살아 있어 그 뜻을 잠시 접어 뒀다. 


1918년 10월(음력, 이하 같음) 모친상에 이어 12월에 고종의 사망 소식을 접하게 됐다. 그는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머리를 풀고 미음을 먹으며 상을 치르고 아침저녁으로 망곡하며 세월을 보냈다.

마침내 탈상에 이르자 이명우, 권성 부부는 독약을 마시고 눈을 감았다. 1920년 12월 20일(양력은 1921년 1월 28일) 새벽 두 시였다. 부인은 이내 절명했고 선생이 뒤를 따랐다.


이날 공개된 유서는 가로세로 각 20㎝, 30쪽 분량 소책자 형태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 유서는 소실을 우려한 선생의 아들 이동희 씨(작고)가 6·25 전쟁 직전에 원문을 소책자에 옮겨 적은 것이다. 선생은 자결하면서 한문으로 된 비통사와 경고, 유계를, 부인은 한글로 된 유서를 남겼다.

권성 부인은 자결 순국한 유일한 여성

선생은 유서에서 “나라를 잃고 10여 년 동안 분통함과 부끄러움을 참았으나 이제는 충의(忠義)의 길을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위정척사 세대에게 있어서는 ‘왕권이 곧 국권’으로 이해됐으니 황제의 죽음을 따르는 것이 곧 충의였기 때문이다.


부인 권성은 네 통의 한글 유서를 남겼다. 아들 삼 형제와 두 며느리에게 남긴 글에는 ‘충의의 길’을 따르는 남편을 따라가겠다는 간곡함이 담겨 있다. “임금과 신하 사이에 의리가 있듯이 부부 사이에도 의리가 있으니 자신은 ‘의부의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김희곤 관장(안동대 사학과 교수, 2009년 당시)은 이명우·권성 부부의 자결 순국이 갖는 독립운동사적 의의를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는 이는 부부가 함께 자결 순국한 유일한 사례라는 것, 둘째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권성 부인은 일제강점기에 자결 순국한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또, 여성이 한글 유서를 남긴 사례 또한 흔하지 않으니 이는 독립운동사뿐 아니라 국문학적 자료로도 상당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끝으로 안동은 일제강점기 10명의 자결 순국자를 낳았는데 이로써 류도발·류신영 부자의 순국에 이어 부부 순국의 사례를 더했다는 것이다.

출처: ▲ 권성 부인의 한글 유서

부자 순국의 류도발·류신영

부자 순국의 주인공 류도발(1832~1910)은 하회 사람이다. 망국의 소식을 들은 그는 안동의 옛집에 돌아와 사당에 절하고 절명시 한 수를 남기고 1910년 10월 26일 순절했다. “신주를 묻고 광복을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곡기를 끊은 지 17일 만이었다.


류도발의 큰아들 류신영(1853~1919)은 일찍이 을사늑약 이듬해 봄 안동에서 의병에 참가했고 1910년에는 부친의 순절을 지켜봐야 했다. 1919년 3월 3일 고종 인산일에 제문을 지어 보낸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부친이 순절한 지 9년 만이었으니 대를 이은 그 충절의 의기를 무엇으로 기리겠는가. 


당시 자료 공개로 이명우·권성 부부 지사의 순국 전모가 밝혀졌으니 보훈이 뒤따라야 함은 물론이다. 김희곤 관장은 유족들이 2009년 1월 보훈처에 관계 자료를 붙여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을 마쳐 국가보훈처의 최종 심사를 거치면 오는 8·15 광복절에는 포상이 이뤄질 거라고 내다봤다. 


8·15 건국절 논란에 이어 뉴라이트 등 보수세력들의 역사 농단이 도를 넘는 이때, 한 유생 부부의 자결 순국을 되새기는 감회는 남다르다. 비록 왕권을 국권으로 동일시한 전근대적 국가관을 보여주기는 하나 충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그 비장한 기개와 결단의 ‘부부 동행’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덧붙임: 2010년에 이명우 선생은 건국공로 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부인인 권성 선생의 서훈이 빠진 것은 애석하기 그지없다.)

* 외부 필진 낮달 님의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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