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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르크에서 빌르레까지

조회수 2020. 5. 25. 14: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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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일하다”라는 그리스어 신에르고스(syn-ergos)에서 유래한 시너지는 서로 다른 둘이 하나가 되어 더 큰 이익을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힘을 합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닙니다. 이질적인 존재들이 뒤섞이는 과정에는 잡음이 뒤따릅니다. 잡음은 균열을 만들고, 균열은 분열을 낳습니다.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빚어지면 쌍방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동반 상승 효과가 발생하려면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서로를 묶어주는 공통의 가치가 필요합니다.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없으면 관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어야 합니다. 

1997년에 출시한 마이스터스튁

“잉크는 어디에 넣어야 하나요?” 몽블랑(Monblanc)이 시계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 기자는 짓궂은 농담을 던졌습니다. 고급 만년필 명가는 1997년 돌연 시계 사업에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필기구에서 가죽 제품까지 사업 영역을 넓힌 몽블랑은 기계식 시계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과감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몽블랑은 스위스 시계의 요람인 르로클의 어느 빌라에 둥지를 텄습니다. 공교롭게도 이곳은 몽블랑이 설립된 1906년에 지어진 건물이었습니다. 첫 번째 시계의 이름은 브랜드를 대표하는 만년필 마이스터스튁에서 따왔습니다. 블랙 컬러와 골드 케이스를 이용해 진중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표현한 마이스터스튁은 기계식 시계의 부흥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올라타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후 스타, 스타 레이디, 타임워커 같은 컬렉션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몽블랑은 성공 궤도에 안착했습니다. 

바야흐로 기계식 시계의 시대였습니다. 손목 위의 작은 물건은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를 넘어 사치재,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품의 면모가 더 부각됐습니다. 시계 제조사는 앞다투어 기술적 우월함을 대변하는 컴플리케이션과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내놓았습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은 마케팅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훌륭한 향신료였습니다. 스위스의 터줏대감들과 비교하면 몽블랑은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몽블랑의 시계는 인기가 있었지만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정한 워치메이커로의 도약이라는 과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2006년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모기업인 리치몬트 그룹이 빌르레에 기반을 둔 매뉴팩처를 인수했습니다. 매뉴팩처의 이름은 로마 신화 속 지혜의 여신에서 유래한 미네르바(Minerva)였습니다. 

미네르바의 역사는 1858년 스위스 상티미에의 빌르레라는 마을에서 출발합니다. 오늘날 많은 제조사가 시계 생산의 거의 모든 과정을 관장하는 수직통합형 모델을 추구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과거에는 개별 공방에서 생산한 부품을 한데 모아 조립한 뒤 무브먼트를 납품하는 구조였습니다. 미네르바의 모태가 된 로버트 프레르 빌르레(Robert Frères Villeret)를 설립한 찰스 이반 로버트(Charles Ivan Robert)와 이폴리트 로버트(Hyppolite Robert) 형제는 빌르레에서 에보슈 무브먼트를 판매했습니다. 1885년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린 국제박람회에 출품한 회중 시계가 메달을 수상하자 찰스 이반 로버트는 회사를 대표하는 브랜드의 필요성을 자각했습니다. 2년 뒤인 1887년 마침내 미네르바가 탄생합니다. 미네르바로 사명을 바꾼 회사는 크로노그래프를 주축으로 한 각종 계측 장비를 비롯해 군용 시계와 회중 시계를 생산하며 착실하게 성장했습니다. 내실 있는 운영과 워치메이킹의 전통을 고수한다는 철학을 고집한 미네르바는 유명 제조사들이 하나 둘씩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무너지지 않고 버텨냈습니다.

2006년 미네르바를 인수한 리치몬트 그룹은 몽블랑과 미네르바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몽블랑에게 미네르바는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특히 대대로 내려온 크로노그래프의 비전은 매력적인 유산이었습니다. 미네르바로서는 몽블랑의 힘을 빌리는 것이 힘들게 지켜온 기업을 유지하는 길이었습니다. 럭셔리 업계의 거물과 소규모 워치메이커. 둘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습니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완성되는 닙, 예술적 성격이 짙게 묻어나는 하이 아티스트리 컬렉션에서 알 수 있듯이 몽블랑은 장인 정신이라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이름이 한 세기 넘게 이어질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장인 정신이었습니다. 덕분에 몽블랑과 미네르바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몽블랑 빌르레 1858 엑소투르비용 라트라팡테
미네르바 고급 시계 연구 기관에서 기획한 최초의 메타모포시스

2007년 미네르바는 빌르레 매뉴팩처로 거듭났습니다. 몽블랑은 역사적인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로 몽블랑 빌르레 1858(Montblanc Villeret 1858)이라는 컬렉션을 개설했습니다. 둘의 이름과 미네르바의 창립 연도를 동렬에 세운 이 컬렉션은 그전까지 몽블랑이 선보인 것과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몽블랑의 이름을 내걸었지만 내면에는 미네르바가 자랑하는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숨쉬고 있었습니다. 수려한 마감을 곁들인 무브먼트는 생김새는 물론이고 제조 방식까지 전통을 따랐습니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미네르바의 서명과 화살표 모양의 상징은 무브먼트에 아로새겨졌습니다. 브랜드간의 합병이 이루어지면 당한 쪽의 이름은 으레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상대방의 자취를 없애고 자신의 유산으로 둔갑시키는 게 일반적입니다. 몽블랑은 통념을 뒤집었습니다. 오히려 미네르바를 앞세워 워치메이킹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모양새는 몽블랑이 미네르바를 병합했지만 실은 동반자적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시너지를 극대화하는 영리한 처사였습니다. 이듬해 몽블랑은 전통 워치메이킹을 후대에 전하고 젊은 워치메이커를 양성하는 재단을 설립했는데, 재단의 이름을 미네르바 고급 시계 연구 기관(Institut Minerva de Recherche en Haute Horlogerie)으로 명명하며 경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몽블랑 르로클 매뉴팩쳐
몽블랑 빌르레 매뉴팩쳐

몽블랑은 스위스 시계의 심장부에 두 개의 생산 기지를 거느리며 어엿한 워치메이커로 발돋움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심플 워치부터 컴플리케이션을 망라한 제품이 쏟아졌습니다.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덧붙이며 깊이를 더했습니다. 브랜드 정신의 뿌리인 몽블랑 산의 높이를 뜻하는 동시에 20세기 초 대서양 횡단에서 영감을 얻은 4810, 인도 항로를 개척한 탐험가의 개척 정신을 기리는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몽블랑의 포트폴리오를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한 몽블랑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 곳으로 향했습니다. 

1858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 리미티드 에디션 100
칼리버 MB M16.29

2015년 빌르레 매뉴팩처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미네르바가 주연으로 발탁됐습니다. 작품명은 1858이었습니다. 몽블랑과 빌르레의 이름을 없애고 1858이라는 숫자만 노골적으로 남긴 것은 미네르바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1858은 미네르바가 20세기 초반에 제작한 군용 시계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습니다. 야광 도료를 칠한 커시드럴 핸즈와 과장된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가 특징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몽블랑이 1930년대에 사용한 로고를 불러와 컬렉션의 방향성이 헤리티지 복원에 있음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습니다. 

타임워커 크로노그래프 랠리 타이머
타임워커 크로노그래프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1858을 필두로 미네르바의 영혼은 타임워커에도 스며들었습니다. 몽블랑은 타임워커를 리뉴얼하는 과정에서 스포츠 워치에 어울리는 이야깃거리를 미네르바의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타임워커의 스포티한 성격은 한층 강화됐고, 스톱 워치를 표방한 디자인은 시계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데 일조했습니다. 

빙하와 설산의 이미지를 묘사한 1858 지오스피어
스타 레거시 크로노그래프 데이&데이트 43mm
2020년 헤리티지 컬렉션

미네르바 설립 160주년을 맞은 2018년. 몽블랑은 대대적인 개편을 선언했습니다. 비대해진 컬렉션을 통폐합하는 동시에 각 컬렉션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규정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미네르바가 있었습니다. 모터스포츠와 레이싱을 주제로 한 타임워커처럼 1858에는 산악 탐험 정신을, 스타 컬렉션의 후신인 스타 레거시에는 전통 워치메이킹이라는 테마를 부여했습니다. 미네르바로부터 갈라져 나온 세 기둥이 몽블랑을 떠받치면서 전체적인 구성이 탄탄해졌습니다. 2019년에 공개한 헤리티지 컬렉션으로 미네르바의 활약은 절정에 이릅니다. 1940~1950년대 미네르바의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를 모티프로 한 헤리티지 컬렉션을 통해 몽블랑과 미네르바의 경계는 더욱 희미해졌습니다. 

해가 지날수록 완숙해지는 몽블랑 워치메이킹의 이면에는 미네르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됐습니다. 이들의 동지적 관계는 시계 업계에서 유례없는 시너지를 만들어냈습니다. 미네르바가 몽블랑의 비호 아래 유구한 역사를 보존했다면 몽블랑은 미네르바의 힘을 빌려 21세기에 가장 성공한 워치메이커 중 하나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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