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간 지하실에 갇혀 살았던 소년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잭에게 가로, 세로 길이가 3.5m에 불과한 작은 방은 세상의 전부다. 방에는 모든 것이 있다. 방에 있지 않은 것은 TV에 있는데 거기는 또다른 행성이다. 천정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온다. 잭은 그 햇빛으로 그림자 놀이를 하면서 논다. 방에는 항상 엄마가 있다. 방과 엄마. 잭이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이다.
방으로 밤마다 괴물이 들어온다. 괴물은 모든 것을 가져다준다. 청바지도 가져오고 사과도 가져온다. 괴물이 오면 잭은 옷장에 숨어 있어야 한다. 괴물이 엄마와 함께 있으면 침대가 흔들린다. 그러면 잭은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괴물은 진짜일까? 잘 모르겠다. 옷장 밖으로 살짝 나가본다. 침대 위 엄마 옆에 괴물이 잠들어 있다. 털복숭이 괴물을 쳐다본다. 엄마가 깜짝 놀라 얼른 옷장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지른다. 잭은 엄마에게 잘못했다고 말한다. 다시는 옷장에서 나오지 않겠다며 싹싹 빈다.
그날 밤, 엄마는 잭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이 방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고. 세상은 넓다고. TV에 나오는 것들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라고. 가짜인 것도 있지만 대부분 진짜 존재하는 거라고. 잭은 혼란에 빠진다. 이 방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TV 행성이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잭에게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를 방에서 내보내줄게. 진짜 세상으로 나가. 너는 세상을 좋아하게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엠마 도노휴의 소설 [룸], 그 소설을 각색한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영화 <룸>(3월 3일 개봉)은 보는 내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다. 한 남자에게 납치, 감금된 뒤 무려 7년 동안 성폭행당하며 방에 갇혀 사는 여자 조이(브리 라슨)와 그가 방 안에서 낳은 아들 잭(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이야기다. 가뜩이나 처절한 소재인데 영화는 아이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그래서 더 애처롭다.
소설 [데미안]을 쓴 헤르만 헤세는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했다. 헤세는 그러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고 했을 뿐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깨뜨리고 나와서 진짜 세계와 맞닥뜨리면 그 다음은 뭘까? 잭은 엄마의 작전에 따라 괴물을 속이고 방을 빠져나온다. 그가 달리는 차 위에서 생전 처음으로 움직이는 하늘을 볼 때 관객의 심장도 함께 요동친다. 생전 처음 보는 하늘, 거기다가 세계가 방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 잭의 동공이 커진다. 도대체 여기는 어딘가. 그 다음은 뭔가.
영화는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좁은 방 안에 갇힌 세계, 2부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세계를 보여준다. 2부에서 잭은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 한다. 바닥에 발바닥을 딛는 것도 이상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이 신기한 아이와 엄마를 궁금해한다. 두 사람은 알을 깨고 나왔지만 그들이 만난 새로운 세계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지켜보고 있는 또다른 울타리로 둘러싸인 곳이다. 잭은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끔 그 방이 그리워요. 그 방에는 항상 엄마가 있었어요."
잭은 엄마와 함께 다시 그 방으로 가본다. 엄마는 악몽을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아이의 부탁에 잠깐 들르기로 한다. 반쯤 헐리고, 침대도 세면대도 사라진 그곳에서 잭은 남아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침대야, 안녕 램프야, 안녕 옷장아. 그리고는 엄마의 썩은 이빨을 손에 꼭 쥔다. 그 이빨은 잭이 방에 살 때 엄마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 이빨을 갖고 나서 잭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앨리스처럼 토끼굴로 떨어져 다른 세상으로 올 수 있었다. 공교롭게 맞아떨어진 우연이지만 잭에게는 소중한 엄마의 이빨이다. 이제 어느 세상에도 속할 수 없는 아이가 된 잭은 다시 한 번 앨리스가 되고 싶다. 지금 손에 꼭 쥔 이 이빨이 그를 또다른 이상한 나라로 데려다줄 수 있기를.
<룸>을 보고 나면 9살난 아역배우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연기(촬영 당시 7살)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소름끼칠 정도로 처참하고 한편으로는 전혀 새로운 날것의 감정들을 어떻게 알고 연기하는지 놀랍기만 하다. 17살에 방에 갇혀 7년을 살아온 엄마 조이 역할의 브리 라슨도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스물 일곱의 나이에 라슨은 아들을 지키기 위해 끔찍한 환경을 견뎌내는 모성애를 연기했다.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잭을 끌어안고 울부짖는 모습은 영화가 끝나도 한참 동안 잊기 힘들다.
감독 레니 에이브러햄슨의 전작은 아주 독특한 음악영화 <프랭크>였다. 세상을 거부하며 산속에서 가면 쓰고 음악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프랭크>에서 가면을 절대 벗지 않는 천재 뮤지션은 시끌벅적한 세상으로 나오자 안타깝게도 재능을 잃고 만다. <룸>도 <프랭크>의 연장선상에 있다. 다섯 살 잭은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되지만 적응은 쉽지 않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은 분명 가장 절실하고 또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알을 깨고 새로운 세상으로 나온다고 해서 진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잭에게 세상은 또다른 악마가 사는 더 넓은 방일 뿐이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이 지독한 세상에서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느냐다. 영화가 1부에서 끝나지 않고 2부를 길게 보여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BY 양유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