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 전전하던 실패한 농구 선수, KGC인삼공사 취업 대반전

조회수 2022. 7. 7. 09: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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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농구 유망주, 부상으로 그만두고 방황하다 공사 취업
코로나 사태로 실물 경제가 큰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 어느 해보다 힘든 고용상황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어려움 속에도 희망은 있습니다. 취업난을 극복하고 있는 청년들을 통해 희망을 전하는 ‘2030 취업 분투기’를 연재합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포츠 스타는 선망의 대상이다. 하지만 그런 선수들은 극소수다. 대부분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새로운 직업을 뒤늦게 찾아야 한다.

고교 시절 부상으로 농구선수 생활을 접은 후, 방황 끝에 늦깎이 대학생을 거쳐 취업에 성공한 김경원 씨. /더비비드

고등학교 1학년까지 농구 유망주였던 김경원(29) 씨. 부상으로 운동을 관두고 2019년 3월 한국폴리텍대학 대구캠퍼스 융합기계과(구 컴퓨터응용기계과)에 입학했다. 졸업과 동시에 2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GC인삼공사에 취직했다. 김경원 씨의 취업 성공기를 들었다.

◇부상으로 그만둔 농구, 그 시절 사진도 보기싫었다

대구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농구 선수로 활동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무엇보다 키가 컸어요. 중학교 입학할 무렵 키가 185cm를 넘었죠. 워낙 장신이다 보니 전문 농구부가 있는 대구 계성중학교로 진학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취업 후 직장인 농구 동호회에서 농구를 하는 모습. 갖고 있는 선수시절 사진이 없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후 사진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김경원 씨 제공

농구에 입문하자마자 KBL(한국프로농구) 농구 유망주로 선정됐다. “주장으로 활동하며 전국소년체전 은메달, 연맹회장기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죠.”

실력이 정점에 이르던 고등학교 시절, 프로 선수로 성장하기 위해 상경까지 했건만 예상치 못한 복병에 발목이 잡혔다. “서울에선 프로 선수와 교류할 기회가 많고, 교육도 더 체계적이라는 말을 듣고 서울 광신정보산업고로 진학했어요. 대구시 소속 선수였는데 서울시로 소속을 변경한 거죠. 이적하면 1년 동안 경기를 뛸 수 없어요. 경기를 못 뛴다는 것에 조바심이 생겨 훈련을 더 열심히 했죠. 1년 후 첫 경기를 뛰는데, 발이 좀 이상했어요. 발등이 아프다고만 생각했는데 피로 골절이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된 상태더군요.”

심한 훈련으로 발이 반복적인 부하를 견디지 못해 손상을 입었고 이전 컨디션만큼 회복은 어려웠다. 결국 열아홉살에 선수 생활을 마무리 짓게 됐다. 상처가 커 돌아보기도 싫었다. 선수 시절 찍은 사진을 모두 없애버릴 정도였다. “이른 나이부터 부상을 입으면 미래가 불투명해져요. 중학생 때부터 정규 수업은 모두 빠지고 농구만 했는데, 갑자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거죠. 서울에 더 이상 머무를 이유도 없었고요. 결국 학교를 관두고 대구로 다시 내려왔어요.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마쳤죠.”

◇방황의 시간 멈추게 한 것

늦깎이 대학생이 된 후 취업을 하기까지 내용을 설명하는 김경원 씨. /더비비드

그야말로 방황의 시간이었다. “처음엔 동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러곤 22살에 강원도 전방으로 군입대했죠. 군대에서 어울린 동기들은 다 학벌도 좋고 미래에 대한 계획이 뚜렷하더라고요. 그때 ‘나도 일단은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전역 후 영진전문대 관광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 다니다 관뒀어요. 적성을 고려하지 않고 들어간 거라, 공부가 힘들었죠.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그때 대학에 다시 가자는 생각에 돈부터 모으기로 했어요. 신용카드 영업직으로 3년 정도 일했죠.”

사회생활을 하며 돈을 벌고 여가를 보내는 즐거움도 잠시였다. “이십 대 중반이 되니까 같이 선수 생활을 했던 동기들이 프로 농구단에 입단하더군요. 저만 정체된 것 같았어요. 선수들 연봉을 들으니까 저도 그들만큼 성공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죠.”

대학에 다시 진학할 계기는 그렇게 찾아왔다. “동네 친구가 대기업에 입사하면서 취업턱을 냈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들 취업이 어렵다고 난리인데, 이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취업에 성공했죠. 자연스레 그 친구가 다녔던 대학에 관심이 가더라고요. 친구도 늦지 않았다면서 다시 공부를 시작해보라고 적극 추천하기도 했고요. 찾아보니 2년제 학위과정을 기준으로 등록금이 한 학기 120만원에 장학 혜택도 다양해서 부담스럽지 않았어요.”

◇선수 생활이 남긴 승부사 기질

대학교 내 마련된 실습실에서, 그날 배운 내용을 반복해 복습했다. /김경원 씨 제공

2019년 3월 한국폴리텍대학 대구캠퍼스 컴퓨터응용기계과(현 융합기계과)에 입학했다. “학과는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그 친구를 따라 선택한 거였어요. 그런데 잠깐 책을 들여다본 것만으로도 관심이 생겼죠.”

컴퓨터를 활용한 기계 가공과 설비 관리를 전문적으로 배웠다. “공구 또는 공작물을 회전시켜 제품을 가공하는 기술을 선반⋅밀링이라고 합니다. 공장에서 범용으로 쓰이는 공작법이죠. 이 기계를 만들 때 필요한 3D 캐드(CAD: 컴퓨터 설계 프로그램), 3D 모델링, CNC 가공, MCT 가공법 등 컴퓨터로 기계를 설계하는 법을 배웠어요.”

선수 시절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어설프게 해선 안 되겠더라고요. 다른 대학이나 사회 경험이 다양한 분들이 많은 건 물론이고 이미 전공 지식을 갖춘 친구들도 많았어요. 근데 저는 공부와 담쌓고 살았잖아요. 이미 퇴사하고 입학했으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습니다. 남들만큼 하려면 몇 배는 더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1년 동안 3개의 산업기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김경원 씨 제공

그가 택한 공부법은 엉덩이를 무겁게 만드는 것이었다. “기숙사에 살면서 이동하는 시간, 하루 4시간씩 자는 시간 빼곤 1학년 내내 학교와 도서관, 실습실에서 지냈죠. 기계를 조작하는 코드는 단 한 개의 입력값만 틀려도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어요. 배운 걸 그때그때 적용해봐야 섬세한 가공법을 익힐 수 있죠. 다행히 실습장이 잘 갖춰져 있어 직접 기계에 입력할 코드를 짜고 원하는 공작물이 나오는지 확인하는 실습을 많이 했어요. 교수님, 경비원 선생님께 실습실을 열어달라고 수시로 부탁했습니다.”

1년 동안 자격증도 3개나 땄다. “입학해서 보니 제가 동기들 70명 중에 네 번째로 나이가 많더군요. 늦은 나이인데다 검정고시라는 게 마음에 걸렸어요. 최대한 빨리 취업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취업을 위해 1년 동안 컴퓨터응용가공⋅기계정비⋅기계가공조립 이렇게 세 분야의 산업기사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학과 커리큘럼에 기술 자격증 취득과 연계된 교과목들이 많아요. 그래도 1년 안에 3개를 모두 취득하려면 공부량이 많죠. 다음날 새로운 진도가 나가니 오늘 들은 수업은 무조건 오늘 안에 복습해야 합니다. 모르는 건 유튜브도 검색하고, 도서관에서 책도 찾아보며 이해될 때까지 공부했어요. 힘들 때마다 ‘내가 우리 과에서 제일 좋은 곳에 취직하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사다리 위에서 확인한 합격 소식

김경원 씨. 불과 2년 전만 해도 세상에 안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다. /더 비비드

자격증을 취득하니 자신감이 붙었다. 취업을 위한 전략을 짰다. “자격증은 모두 땄으니 2학년부터 바로 취직 준비에 돌입했어요. 학교에 2학년 2학기부터 ‘현장밀착형 교과운영’제도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전공실습교과를 기업체 현장과 연계하여 실시하는 제도인데 취업 후 현장학습활동을 해당 교과목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제도죠. 2학년 1학기부터 기계 가공 관련 직군 위주로 지원해봤습니다.”

중소기업에 먼저 입사하고, 경력을 쌓아 대기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검정고시 이력 때문인지 처음부터 희망 기업에서 합격 연락이 오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알루미늄판 제조 공장 생산직으로 입사했어요. 알루미늄판을 만드는 기계를 정비하는 업무였는데요. 4개월 정도 다녀보니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임금⋅승진 체계가 불투명하고 자기 개발을 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중소기업에 있어 보니 대기업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커지더라고요.”

반년도 안돼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졸업 직후 상반기 채용 시기가 다가왔는데, 블라인드 채용을 하는 공기업 공채공고들이 보이더군요. 전공 지식도 있으니 서류 합격만 하면 면접은 자신 있었죠. 영업직을 하면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건 익숙했으니까요. 관련 직군 공고 중에 KGC인삼공사의 시설관리 분야 채용 공고가 있었어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직장인 농구 동아리에서 농구를 하는 김경원씨와 인터뷰 중인 모습. /김경원씨 제공, 더비비드

KGC인삼공사는 성장 가능성과 상호협력성을 중시하는 회사다. 두 인재상을 중점으로 준비하되, 많은 지원자 사이에서 도드라질 수 있는 자기소개서를 준비했다. “성장 가능성 측면은 늦게 대학에 진학했지만 단기간에 자격증을 취득한 이야기를 녹였고, 상호협력성은 운동선수 시절 이야기를 살려 작성했어요. 워낙 지원자가 많은 기업이라고 들어서, 면접관의 기억에 남을 자기소개서로 만들기 위해 가장 특이한 이력을 전면에 내세운 거죠.”

최종 임원 면접에서 했던 마지막 답변이 아직도 생생하다. “면접관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묻더라고요. KGC인삼공사의 블루 워커가 되겠다고 답변했어요. 농구 경기 중에 벌어지는 몸싸움이나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선수를 ’블루 워커’라고 하거든요. 팀의 승리를 위해 희생하는 역할이죠. 저도 근무하며 궂은일을 앞장서서 하겠다고 답변했어요. 이 부분이 인재상과 부합해 좋은 결과를 낸 것 같습니다.”

인적성 검사와 1, 2차 면접을 거쳐 KGC인삼공사에 최종 합격했다. 경쟁률은 250대 1이었다. 합격 소식을 공장 사다리 위에서 확인했다. “등에 용접기를 메고 사다리를 오를 때였어요. 등에 멘 장비가 유난히 무거웠죠. 합격 소식을 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 겨우 내려온 기억이 납니다.”

(왼쪽부터) 취업 후 받은 임용장, 근무중인 김경원 씨. /김경원 씨 제공

정관장 부여 공장 시설부에서 기기 설비 관리자로 근무한다. 홍삼 제품을 여기서 만든다. “건강기능식품 생산 라인에서 기계 오류는 없는지 확인하고 이상이 생기면 컴퓨터로 조작해 문제를 바로 잡는 업무를 하고 있습니다. 산업기사 취득 후 동일 및 유사 직무분야에서 1년 이상 실무에 종사하면 기사 시험을 치를 수 있어요. 퇴근하면 틈틈이 기사 시험공부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승진을 위해서요.”

불과 2년 전만 해도 세상에 안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이젠 뭐든 도전할 자신이 있다. “선수 생활을 접었을 때가 아직도 기억나요. ‘내가 노력해도 안되는 게 있다’는 생각에 절망이 컸어요. 그 이후로도 쭉 그런 자기연민을 갖고 살았던 거 같아요. 또 실패할까봐 새로운 목표를 설계하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성공의 경험보단, 어쩌면 실패를 극복해본 경험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성과가 어찌됐든간에요.”

/더비비드 X 한국폴리텍대학 공동기획
김영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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