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Special Interview] 스코어본 하이에나들

조회수 2022. 2. 16. 11:4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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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돌멩이

이제 막 훈련이 끝났는데 내일도 눈을 뜨면 운동장에 나와야 한다. 모레도, 글피도, 내년에도 마찬가지다. 평생을 해온 야구지만, 죽도록 하기 싫은 날이 있다. 그런데도 늘 걸음은 운동장으로 향한다. 아직은 야구가 좋으니까. 하지만 이 시절도 잠깐, 누군가에게는 야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때가 온다. 학교 혹은 구단의 부름을 받지 못하면 두 갈래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야구를 계속하느냐, 마느냐. 우린 그 길에서 죽도록 싫은 야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도 굴러가다 보면 좋은 날이 올 테니. 그게 야구고, 그게 우리네 인생이니까!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Kyunghwa So Location Dugout Magazine Studio

오랜만에 독립야구단 선수들을 만나네요.

최현성(이하 현성) 안녕하세요. 스코어본 하이에나들의 외야수이자 주장을 맡은 최현성입니다.

신승원(이하 승원) 스코어본 하이에나들 포수 신승원입니다.

이창율(이하 창율) 스코어본 하이에나들 투수 이창율입니다.

승원 선수가 본지 SNS 채널을 통해 먼저 인터뷰를 요청했죠. 용기가 필요했을 텐데요.

승원 연말이 다가올수록 독립야구단 분위기가 다 비슷하더라고요. 앞으로의 행보를 알 수 없으니 힘든 거죠. 어쩌면 이 인터뷰를 계기로 내년에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메시지를 보냈어요. 친구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얼굴이 꽤 낯이 익어요. 이전에는 프로 생활을 했다고요.

현성 화려한 데뷔는 아니었어요. 대학교 졸업 후 지명을 받지 못해 입단 테스트를 본 후 LG 트윈스에 들어갔거든요. 근데 그 연도에 육성 선수가 저 혼자였어요. 남들과 시작부터 달랐죠. 1년 안에 못 보여주면 방출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에 늘 기죽어 있었고, 조금만 실수해도 주눅이 들었어요. 움츠러들어 있었다는 표현이 딱 맞을 거예요. 그렇게 1년을 보낸 후 방출 통보를 받아 아쉬움이 큽니다.

승원 사실 고등학교 때 못하는 성적은 아니었거든요. 황금사자기 3관왕도 했고, 팀 우승도 2번이나 시켰기에 당연히 지명받을 줄 알았는데 이름이 안 불리더라고요. 제가 북일고등학교를 나왔는데 드래프트 후 한화 이글스에서 같이 하자고 연락이 와서 육성 선수로 입단하게 됐죠. 하지만 2년 뒤 제 능력이 부족한 탓에 군대에 가라고 하셨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밖에서 돌고 있습니다.

창율 전 형들과 다르게 지명을 받고 LG에 입단한 케이스예요. 2차 2라운드라는 빠른 순번을 받아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했죠. 비록 구속이 빠르진 않지만 제 공이 좋다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막상 프로에 가보니 다르더라고요. 아무리 제구가 잘 돼도 힘 좋은 타자를 만나면 안타를 맞기 일쑤였어요. 안타를 맞는 이유에 대해 계속 고민하다 보니 스피드 욕심이 생겼고, 그게 과해지며 장점까지 잃게 됐어요. 가장 후회스러운 부분이죠. 많은 분이 부상 때문에 나오게 된 거로 아는데 사실 아픈 곳은 없었어요.

2018년 방출 이후 2021년 스코어본 입단 전까지의 시간이 비더라고요. 활동 이력이 전혀 없던데 그동안은 어떻게 지낸 건가요?

창율 군대에 다녀왔어요. 안 그래도 그즈음에 영장이 나와서 한 달만 미뤘다가 가려고 연기해놓은 상태였는데 방출 통보를 받은 거예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2년 동안 푹 쉬면서 몸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바로 현역으로 입대했죠.

승원 선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다섯 팀이나 경험했더라고요. 쉽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요.

승원 한화에서 나온 후 연천 미라클이라는 독립야구단에 2년 정도 있었어요. 그 후 질롱 코리아 테스트를 보고 갔다가 일본의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로 옮겼죠. 스코어본은 마지막 도전이었어요. 그저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한 거예요. 돈이 중요했으면 돈 벌러 갔겠죠. 주위에서 저를 보고 성실하다고 느꼈는지 같이 일하자는 러브콜이 꽤 들어왔거든요. 마지막에도 코치 제의가 있었는데 딱 한 번만 더 내가 좋아하는 걸 해보자는 마음이 컸어요.

2021 독립야구 경기도리그 우승 축하로 인터뷰의 포문을 열고 싶었는데, 그 사이 구단 해체가 결정됐어요. 언제 어떻게 소식을 들었나요?

현성 우승할 때까지만 해도 전혀 몰랐고요. 우승 이후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궁금하잖아요. 다들 내년에도 스코어본에서 뛰고 싶었으니까 이제 각자 해산하는 건지 내년을 위해 마무리 훈련에 들어가는 건지 저희끼리 말이 많았어요. 근데 시즌 말에 감독님께서 시합이 끝나도 2주간은 마무리 훈련을 할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이후 훈련에 임하고 있는데 기사가 하나 떴죠. 팀 해체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금방 내려가더라고요. 그때 팀원들은 어느 정도 눈치를 챘어요. 없어지는 쪽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죠.

창단 1년 만의 급작스러운 해체였어요.

승원 회사 측에서 사전에 운영비로 짜놨던 예산보다 크게 오버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팬분들도 실망이 컸나 봐요. 구단 유튜브 채널에 댓글을 많이 다셨는데, 사실 야구단 운영에 큰돈이 들어가는 건 맞잖아요.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지만, 전 감사한 마음이에요.

선수 생활은 어땠나요?

창율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좋은 추억이 많아요. 혜택도 좋았고요. 이만큼 지원해주는 데가 어디 있겠어요. 다만 독립 리그에 관한 관심이 적어 아쉬웠어요. 이렇게까지 관심을 못 받을 줄 몰랐거든요. 아무리 경기를 열심히 해도 보러 오는 사람 하나 없고, 와봐야 가족들이고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저희끼리만 하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근데 그런 마음이 들 때쯤 가끔이지만 한 번씩 관계자분들이 보러 오시니까 그것만 보며 운동했어요. 그분들 앞에서 잘하면 테스트라도 볼 수 있게 해주시니까요.

현성 성적으로 보면 남들은 잘했다는데 스스로는 만족을 못 하는 것 같아요. 운동선수라면 누구나 그럴 거예요.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을 텐데’라는 후회가 남죠. 저랑 승원이 형이 팀에서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하거든요. 어디 가서 항상 막내로 있다가 갑자기 최고참 역할을 하려니 못하겠더라고요. 애초에 장난기가 많은 성격인데 주장은 그러면 안 되잖아요. 그래도 동생들이 워낙 착해서 1년간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어요.

승원 이번에 삼성 라이온즈에 들어가게 된 (박)정준이랑 새벽까지 얘기했던 게 있어요. 아무래도 독립야구단 분위기상 선후배 관계가 명확하지 않으니 우리가 현성이에게 힘을 실어주자고, 중심을 잡을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주자고 의기투합했죠.

역시 안방마님답군요. 여러 독립야구단을 거쳤으니 사정을 더 잘 알겠어요. 후원 기업의 재정 상태에 따른 구단 운영은 어쩔 수 없는 시스템인 듯해요.

승원 독립야구단은 스폰서가 많아야 하거든요. 제가 일본팀에 있을 때도 유니폼에 지역 사회 패치가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었어요. 근데 우리 팀은 본아이티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그것 때문에 사실 걱정이 컸죠. 숙소비, 전기세, 가스비 등 이런저런 게 점점 쌓일 텐데 스폰서가 안 붙더라고요. 독립야구가 발전하려면 시에서 관심을 둬야 한다고 봐요. 조금 더 지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스코어본은 기존 독립야구단들과 달리 회비 면제, 숙식 제공 등 여러 혜택이 있었다고요.

현성 금전적으로 부담이 적었죠. 말씀하신 것처럼 돈을 안 받았으니까요. 주변에 보면 돈을 벌기 위해 결국 꿈을 접고 나가는 친구가 많거든요. 훈련 시설도 프로만큼은 아니겠지만 정말 좋았고요.

불투명한 미래에 계속해서 문을 두드린 용기의 원천, 야구 선수의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현성 이것만 해왔으니까요. 고등학생 때는 지명을 못 받으면 대학교에 가면 돼요. 근데 대학생 때 지명을 못 받으면 갈 데가 없는 거예요. 그래도 포기할 순 없더라고요. 나중에 뭘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았어요. 1년 돈 빨리 벌어봤자 얼마나 내 인생에 도움이 되겠나 싶기도 했고요.

승원 당연히 좋아하니까 계속하는 건데, 전 좀 개념이 다른 게 스스로 실력이 느는 게 보였어요. 여러 팀을 거치며 점점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경험하다 보니 더 재미있고, ‘나이를 먹을수록 느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의 여유도 생겼고요.

창율 프로에 있어 봤잖아요. 물론 잘하는 선수들도 있지만, 프로에 있다고 해서 모두가 야구를 잘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여기서 열심히 해서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이었어요.

‘야구’가 아닌 다른 길을 상상해본 적은 없나요?

현성 저만 그런 건진 모르겠는데 밖에 뭐가 있는지 잘 몰라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해요. 나가면 할 거 많대요. 근데 저희는 초등학교 때부터 펜 대신 공을 잡고 살았고, 아는 거라곤 야구밖에 없잖아요. 평생 배운 게 이것뿐인데, 무서운 거죠. (운동선수의 딜레마가 아닌가 싶어요. 평생을 이거 하나만 해온 사람들이기에 다른 진로를 찾는 게 쉽지 않잖아요. 결국 ‘야구’로 벌어먹고자 하는 마음일 테고요.) 맞아요. 그리고 ‘할 게 많다는데 그걸 어디 가면 알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누가 알려주는 게 아니잖아요. 선생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도 미래에 대한 걱정에 잠을 못 자고 있어요.

창율 제대 후 1년밖에 안 해봤기에 다른 진로를 고민할 겨를이 없었고요. 안 그래도 아는 선배에게 연락이 와서 애들 가르치는 일을 잠깐 해봤는데 전 제가 직접 뛰는 게 더 좋더라고요.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말도 안 듣고, ‘왜 이렇게 안 되지?’ 싶기도 하고요.

그럼 해체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

현성 ‘혹시나’라는 게 있잖아요. 제게도 뭔가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하루하루를 꾸준히 운동하며 보내고 있어요. 올해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거든요.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알아보고 있는데, 어쩌면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창율 구단 관계자분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어요. 안부 인사도 드릴 겸 혹시 계획된 입단 테스트가 없는지 물어보는 거죠. 절대 먼저 얘기는 안 해주시거든요. 그분들도 바쁘고, 저만 챙겨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꾸준히 헬스로 몸을 만들고 있습니다.

27승 5무 8패로 리그 1위를 차지하고 이어진 연천과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습니다. 당시 우승의 감회가 어땠나요?

현성 제가 감정이 메마른 건진 모르겠는데, 막 감동적이진 않았어요. 무슨 머리에 세뇌된 사람처럼 이기는 건 당연한 거고, 어차피 우승도 우리가 할 거라는 생각이 박혀있었거든요. 그래서 우승했을 때도 ‘우리가 해야 할 걸 했네’라며 담담했죠.

승원 전 좀 다릅니다. 물론 우승할 거라곤 예상했어요. 타순도, 투수들도 좋았으니까요. 그래서 편하게 우승할 줄 알았는데, 첫 경기에서 질 줄은 몰랐어요. 딱 그때부터 걱정이 시작됐죠. 에이스가 던지는데 진 거니까요. 다행히 다음 게임에 잘해서 우승할 수 있었어요.

창율 전 무조건 우승할 거라고 장담하진 않았어요. 선수도 많이 나갔고, 남은 투수들의 팔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았거든요.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주장이 됐는데, 주장으로서 더 마음이 착잡했겠어요. 전에 몸담은 용인시 빠따형 독립야구단에 이어 두 번째 겪는 구단 해체잖아요.

현성 그렇죠. 제가 가는 곳마다 그러네요. 사실 제일 착잡한 건 구단 해체가 결정되고 나서 내년에도 계속하려고 했던 친구들이 야구 자체를 그만둔다는 거예요. 본인의 선택이니 제가 뭐라고 할 순 없지만 안타깝죠. 아직 젊은 나이인데, 끽해봐야 반오십도 안 된 애들이 아예 다른 길로 간다고 하니까 마음이 아프긴 해요. 애매합니다. 누구의 잘못도 없으니까요.

이 자리를 빌려 동료들에게 주장으로서 남기고 싶은 말이 있나요?

현성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정 많이 들었는데, 어디서 뭘 하든 응원할게.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고, 연락 좀 해. 자주는 아니더라도 간간이 안부 전하며 지내자. 나쁜 길로 빠지지 말고 각자 원하는 거 하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

가까이서 본 송진우 감독은 어떤 사람인가요?

승원 감독님은 틀린 말은 안 하세요. 혼난 기억도 별로 없고, 저희를 존중해주셨어요. 감독님 말대로 하면 다 맞았던 거 같아요. 무서울 땐 무서운데, 그렇지 않을 땐 한없이 자유롭고 장난기가 많은 분이에요. 함께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스코어본에서 배운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창율 전 사실 감독님께 많이 혼났거든요. 감독님은 현역 때 워낙 잘 던지셨잖아요. 그러니까 투수들이 제구가 안 되는 날이면 이해를 못 하시는 거죠. 본인은 잘 던졌으니까. (웃음) 제가 초구에 볼을 자주 던졌는데, 하루는 감독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던지기만 하면 볼이라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오기가 생겼고, ‘더는 저 말이 안 나오게 해야겠다. 스트라이크를 던지고야 말겠다’라는 다짐을 했어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제가 진짜 잘 던지니 아무 말도 안 하시더라고요. 일부러 자극받으라고 그러신 거였어요. 덕분에 정말 좋아졌습니다.

승원 포수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어요. 배터리 코치님이 안 계시다 보니 스스로 생각해야 했거든요. 여러 영상을 찾아보고 연구하며 발전할 수 있었죠. 최해명 코치님께도 많이 배웠습니다. 나중에는 거의 아버지라고 느껴질 정도로 절 챙겨주셨어요. 저랑은 ‘깐부’라고 할 수 있죠.

현성 야구 기술도 배웠지만, 사람으로서 성숙해지는 시간이었어요. 멘탈이 약한 편이었는데, 코치님들의 여러 조언 덕분에 한층 성장했습니다.

나의 야구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요?

승원 ‘꺼지지 않는 불꽃’이요. 앞으로 야구를 계속하든 안 하든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꺼지지 않는 불꽃의 마음으로 항상 지켜볼 거기 때문에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창율 ‘희망과 좌절의 연속’이요. 잘 될 땐 누구나 웃으면서 하고, 안 될 땐 모두가 고개를 내리니까요. 플레이 하나하나에 감정이 계속 바뀌는 거죠.

현성 ‘성장통’ 아닐까요? 아프면서 크고, 그 아픔의 반복을 견뎌내며 성장하는 게 꼭 성장통 같잖아요. 제가 앞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를 그만두는 그 날에는 엄청나게 커져 있었으면 좋겠네요.

<더그아웃 매거진>은 팬뿐만 아니라 여러 구단 관계자가 애독하는데요. 이참에 자신의 강점을 어필해볼까요? 자기 PR 시대잖아요.

창율 188cm라는 큰 키에서 나오는 높은 타점이 강점이고요. 직구든 변화구든 제가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 제구력을 갖고 있습니다.

현성 이게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수비는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거든요. 물론 주루 센스도 좋습니다.

승원 투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는 게 제가 가진 가장 큰 장점 같아요. 경험이 풍부해 그라운드에서의 빠른 상황 판단도 가능하고요. 방망이는 뭐, 올해 유일하게 4할을 쳤기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리도 살만 빼면 충분히 빨라질 수 있고요. (웃음) 제가 외야수도 됩니다. 일본에서는 외야도 보고 1루도 봤거든요. 그런 멀티플레이어인 점을 구단 관계자분들께서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의 목표도 궁금합니다.

창율 일단 프로에 다시 한번 도전할 계획이에요. 제가 예전에는 누가 말하면 아예 안 듣거나 아예 듣거나 둘 중 하나였어요. 근데 이젠 거를 건 거르고 들을 건 듣는 귀가 생겼거든요. 이를 활용해 최대한 능력치를 끌어올려서 프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승원 전 야구 선수 이전에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크거든요. 삶의 목표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네요. ‘나쁜 사람은 되지 말고 좋게좋게 살자’가 목표입니다. 그리고 사실 인터뷰 요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화에서 연락이 와 전력분석원으로 들어가게 됐거든요. 열심히 연수받아 최고의 전력분석원이 될 테니 응원해주세요.

현성 잘 사는 건 당연한 거고, 제가 관종기가 좀 있어요. 돈보다 명예가 중요한 사람이라 남들이 직업이 뭐냐고 물어봐서 대답했을 때 감탄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물론 제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요. 그게 야구였으면 좋겠고요.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있나요?

현성 답답해서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부탁 하나만 드리고 싶어요. 독립리그에도 좋은 선수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독립리그라는 인식이 박혀있어서 실력이 과소평가되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물론 스카우트나 관계자 여러분의 눈이 더 정확하겠지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독립야구단에서 프로에 가는 케이스가 많아지길, 그런 시스템이 정착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

야구팬이라면 꽤 익숙한 노래일 것이다. 야구 하이라이트 프로그램에서 엔딩곡으로 오랜 시간 채택했던 마시따밴드의 ‘돌멩이’ 말이다. 창밖에 어둠이 내려앉고 모두가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굴러, 난 굴러간다. 내 몸이 부서져 한 줆의 흙이 돼도. 내 사랑 찾아서, 내 꿈을 찾아서”라는 가사로 불안정한 현실에도 희망찬 내일을 꿈꾸게 했던 그 시절의 감성이 오롯이 녹아있다.

드래프트 대상자는 매년 1,000명이 넘어가지만, 실제로 프로 선수가 되는 건 100명 남짓. 사람들은 프로에 입성한 100명의 이름에 주목한다. 하지만 남은 900명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아야 할 시간까지 모두 바쳐 야구만 해온 그들의 이야기는 누가 기억할 것인가.

모두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순 없어도, 적어도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될 수 있다. 오늘 만난 세 사람은 유명하진 않아도 각자의 삶의 주인공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었다. 꿈을 꾸는 사람은 반짝반짝 빛이 난다고 했나. 나는 오늘 세 가지 색깔의 빛을 보았다.

▲ 더그아웃 매거진 129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2년 129호(1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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