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Dream] 한화 이글스 윤대경

조회수 2022. 6. 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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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일생(一球一生), 일구일사(一球一死)

“공 하나에 죽고, 공 하나에 산다. 네가 그런 마음으로 던지면 언젠가는 빛이 나는 진짜 다이아몬드가 될 거다.” 영화 ‘퍼펙트게임’에 나온 명대사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앞에 주어진 기회의 소중함을 모르진 않을 거다. 하지만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았다면, 그때 느끼는 절박함이란 그 무엇보다도 강할 것이다. 한화의 ‘믿을맨’으로 성장 중인 윤대경의 야구 인생 역시 마찬가지다. 2013년 삼성 라이온즈에 내야수로 지명됐지만 2018시즌 후 방출됐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일본 독립리그에서 잠시 뛰는 등 순탄치만은 않은 20대를 보냈다. 그렇기에 그의 야구 속에는 오늘도 간절함이 가득하다. 매 경기 공 하나하나의 소중함과 감사함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윤대경이야말로 진정 공 하나에 죽고, 공 하나에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Photo Hanhwa Eagles, Sports Korea Editor Mingyu Kim

#독수리 군단의 ‘선발 투수’

한화 입단 2년 차부터 윤대경은 1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돌풍’을 몰고 왔다. (55경기 51이닝 평균자책점 1.59 5승 무패 7홀드) 불펜의 핵으로 자리 잡았던 그는 작년부터 선발 투수로의 전환을 시도했고, 올해는 ‘풀타임 선발’이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더그아웃 매거진>과는 첫 만남이네요. 소감이 어때요? (5월 10일 인터뷰)

<더그아웃 매거진>에는 유명한 선수들이 나가는 곳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여기 나와서 인터뷰하다니 뿌듯하고 기분이 좋네요. (웃음)

처음으로 선발 투수로서 시즌 개막을 맞이했어요. 어느 때보다 기분이 남다를 거 같은데요.

그럼요. 처음이다 보니 좋은 모습을 꾸준히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커요. 선발 로테이션에 들어간다는 게 아무한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싶어요.

비시즌에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고 준비했나요?

스프링 트레이닝 때 처음부터 선발로 준비하라고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우선 한계 투구 수를 늘리는 데 집중했어요. 선발은 이닝을 길게 끌고 가는 게 가장 중요한 임무니까요. 또 구종 추가에 대해서도 고민했어요. 불펜으로 나갈 때와는 달리 적은 구종만으로는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비시즌에 코치님께서 슬라이더를 던져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어요. 저도 다른 변화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슬라이더를 손에 익히려고 노력했어요.

개막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어요. 현재까지 중간평가를 해본다면요?

60점 정도 주고 싶어요. 지금까지 선발로 여섯 경기 정도 나갔는데, 기복이 조금 있었어요. 첫 경기를 5이닝 2실점으로 막고 나서 퀄리티 스타트도 세 번 해서 시작이 괜찮았는데, 컨디션이 안 좋을 때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몇 번 있었어요. 5이닝도 못 채우고 점수도 많이 내줬는데, 선발로서 절대 보여서는 안 되는 모습이잖아요. 좋은 날과 안 좋은 날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그 차이를 꼭 줄이고 싶습니다.

#구르고 까졌던

야구는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됐는지 궁금해요.

어렸을 때 공부하는 것보다 뛰어노는 걸 좋아했어요. 밖에서 아버지랑 캐치볼 같은 거 하면서 놀곤 했죠.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방송실에서 야구에 관심 있는 학생들 구령대 앞으로 모여달라고 방송이 나오더라고요. 원래 학교에 야구부가 없었는데, 옛날에는 야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인원 모집을 하러 다니는 문화가 있었거든요. 재밌는 게 그때 구령대 앞으로 나온 애들이 엄청 많았는데, 결국 저 혼자만 그 학교로 전학 가서 야구를 시작했어요.

처음에 드래프트에서 내야수로 지명이 됐는데, 원래 주 포지션이 내야수였나요?

아뇨, 학교 다닐 때도 원래는 투수가 주 포지션이었어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투수를 전문으로 하는 경우가 없는데, 중학교 때부터는 투수 파트랑 야수 파트가 나뉘어요. 저는 투수랑 유격수를 같이 보긴 했지만, 그때부터 투수 쪽에서 더 중점적으로 훈련을 했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진로를 정해야 하는데 투수를 하기엔 지나치게 왜소했어요. 사실 지금도 그렇게 큰 키는 아닌데 그때는 말라서 더 작아 보였어요. 그래서 마운드에 서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 야수를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당시 유격수 수비는 자신 있었거든요.

그런데 2년 차에 다시 투수로 전향했어요.

사실 원래 타격에 재능이 별로 없었어요. 처음에 삼성에 지명받을 때도 수비 잘하는 선수로 뽑혔어요. 그런데 프로에 와서 타격 훈련도 하고 경기도 나가야 하는데, 방망이에 너무 소질이 없는 거예요. 타구에 힘이 안 실렸어요. 그때 코치님들이 유격수 수비할 때 1루 송구하는 것처럼 타격할 때 힘을 좀 실어서 쳐보라고 얘기하시기까지 했어요. 결국 농담처럼 말씀하시더라고요. 이거는 노력한다고 되는 방망이가 아닌 거 같다고. (웃음) 그리고 2군에서 첫 시즌이 끝나고 2군 투수 코치님이 진지하게 물어보셨어요. 투수해 볼 의향 없냐고요. 야수를 못 해서가 아니라 투수에 재능이 있어 보여서 권유해보는 거라면서요. 코치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제가 느끼기에도 야수로서 경쟁력이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돌아가기로 했죠.

원래 신체조건 때문에 투수를 포기했다고 했는데, 그 부분에서 힘든 점이 있진 않았나요?

안 그래도 코치님께서 그 부분을 짚어주셨어요. 입단 첫해에 제 키가 178cm였는데 몸무게가 68kg밖에 안 됐어요. 거의 아이돌 몸매였죠. 그래서 무엇보다 살을 찌우는 데 집중했어요. 배고프지 않아도 야식도 일부러 챙겨 먹곤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랑 비교해서 지금은 체중이 늘었나요?) 네. 다행히 지금은 80kg까지 찌운 상태입니다.

삼성에서 방출된 후 일본 독립리그에 진출했어요. 낯선 곳에서 야구를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예상하긴 했지만, 무엇보다 말이 안 통하는 게 좀 어렵고 답답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휴대폰이 제 입이자 귀였어요. 번역기 앱이 없으면 안 됐을 정도니까요. 그러다가 한 달 정도 지나니까 조금씩 동료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대강 뉘앙스를 알게 되더라고요. 말하는 것도 능숙하게 회화를 하는 건 아니어도 기본적인 의사 표현까지는 가능해졌어요.

새로운 팀 동료들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팀에서 한국인이 저 혼자다 보니까 저를 세심하게 챙겨줬어요. 그때는 제가 차도 없을 때라 출퇴근할 때 저를 같이 태워다 주곤 했어요. 그리고 쉬는 날 게임기 있는 친구 집에 같이 모여서 게임 하면서 놀기도 했고요. 또 나중에 제가 프로에 다시 갈 수 있게 됐을 때 동료들이 환송식도 해줬어요. 그래서 일본에서의 시간은 제게 정말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어요. 낯선 곳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을 조금 했는데, 그 친구들 덕에 타지에서 외롭지 않게 잘 지낼 수 있었어요. 지금 보면 고마웠던 게 많아요.

#다시, 그리고 새롭게

독립리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은 어땠나요?

일본에서 성적이 되게 괜찮았어요. 그런데 막연하게 거기서 잘 던지기만 하는 게 다가 아니었어요. 독립리그에 간 이유가 KBO리그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간 건데, 아무리 일본에서 잘하더라도 정작 한국에서 아무도 저를 봐주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KBO리그 관계자분들한테 연락도 돌리고, 제 투구 영상도 보내면서 저를 어필하려고 했어요. 그러던 중에 한화 스카우트 팀과 연락이 닿았어요. 그때 이상군 스카우트 총괄님께서 직접 일본까지 오셔서 제가 던지는 걸 보셨고, 감사하게도 나중에 입단 제의까지 해주셨죠.

그 과정에서 특별하게 도움을 준 사람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지금 저희 팀에 계신 김남형 코치님이요. 코치님이 제 중고등학교 선배시거든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저를 되게 아껴주셔서 원래부터 가까운 사이였는데, 제가 일본에 있을 때 한화에 코치로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아까 얘기한 것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어디라도 연락을 넣고 있었기 때문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코치님한테 부탁드렸어요. 지금 구속이 어느 정도 나오고 몸 상태가 괜찮은데, 입단 테스트라도 볼 수 있게 구단에 얘기해주실 수 있냐고. 사실 그게 정말 어려운 부탁이었던 건데, 감사하게도 코치님이 저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구단에 적극적으로 저를 추천해주셨어요.

먼 길을 돌아 한화 입단이 결정됐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궁금해요.

울컥했죠. 결정되자마자 일본에 처음 넘어왔을 때가 떠올랐어요. 처음에는 1년 정도 있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목표를 갖고 왔는데, 그것보다 훨씬 빠른 3개월 만에 목표를 이뤘으니까요.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입단 직후 92번을 달았다가 2020년부터 지금까지 5번을 달고 있어요. 투수로서는 한 자릿수 번호를 다는 경우가 드문데, 등번호를 5번으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제 기억에 그때 남는 번호가 4번, 5번, 그리고 66번부터 69번 있었는데, 뭔가 5번이 확 끌렸어요. 60번 대 번호는 별로 눈이 안 갔고, 그렇다고 4번은 또 좀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물론 투수가 한 자릿수 번호를 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투수가 5번 달면 어때?’라는 생각에 그냥 제일 마음에 들었던 5번으로 정했어요. 가끔 야수 같다는 말을 종종 듣기는 하는데 이 번호를 달고 좋은 일이 많았던 터라 특히 정감이 가요.

그리고 이듬해 6월 3일, 꿈에 그리던 1군에 올라왔어요.

그때 엄청나게 떨었던 거 같아요. 서산에서 대전까지 운전해서 가는 내내 긴장감이 가득했어요. 1군 경험이 한 번도 없다가 정말 어렵게 찾아온 기회였고, 게다가 당시 나이가 27살이라 마냥 어리지도 않았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남겨야겠다고 계속 다짐했어요. 긴장해서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다시 2군으로 내려가는 일만큼은 막고 싶었어요.

그날 바로 데뷔전까지 치렀어요. 마운드에서도 계속 긴장이 되던가요?

아마 6대2로 지고 있는 상황이었을 거예요. 8회쯤에 불펜 쪽으로 전화가 와서 제가 9회에 투입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때까지도 긴장해서 그런지 어떻게 몸을 풀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변화구를 몇 개나 던지고 올라갔는지, 제 공을 누가 받아준 건지 신경도 못 썼어요. 그렇게 마운드에 올라갔는데, 포수 사인을 볼 때 다리까지 막 떨리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극한의 상황까지 가니까 오히려 평소에 안 나오던 구속까지 나오는 거예요. 흔히 아드레날린이 분출된다고 하죠. 원래는 직구 구속이 140km/h대 초반 정도인데, 그날은 초구부터 146km/h가 나왔어요. 너무 긴장한 나머지 평소에 못 쓰는 힘까지 나왔나 봐요.

구원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다가 작년 6월, 선발로 나서기 시작했어요. 선발 전환은 어떻게 결정된 건가요?

전혀 예상 못 했던 사안이었어요. 작년에 대체 선발로 들어간 선수들의 성적이 잘 안 나와서 팀 사정이 썩 좋지 않았는데, 수석코치님께서 저를 불러서 선발 전환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제안하셨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단장님께서 저를 추천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제안을 듣고 나서 처음엔 부담이 있던 것도 사실이에요. 계속해서 불펜으로만 뛰었기 때문에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있었고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팀에 꼭 필요한 자원이 됐다는 느낌이 들었고, 코치님들이 제게 신뢰를 보내주신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어요.

선발로 나가서도 투구 내용이 나쁘지 않았어요. 그리고 세 번째 선발 등판(6월 16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첫 선발승을 거뒀어요.

사실 시즌 중반에 보직 전환이 결정된 거라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어요. 한계 투구 수나 이닝 소화 같은 부분에서 아쉬움이 많았죠. 그래서 선발승까진 바라지도 않았고, 3~4이닝을 던지면서 최소 실점을 하는 게 최우선이었어요. 그런데 그날은 투구 내용도 괜찮았고, 공 개수를 보니까 5회까지 충분히 갈 만하겠더라고요. 감독님이랑 코치님도 원래는 무리하지 말자고 하시는데, 그날은 한 이닝 더 가보자고 하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까 저도 욕심이 생기면서 무조건 5회까지 책임지고 싶다는 마음이 막 드는 거예요. 영상으로 보면 되게 깔끔하고 쉽게 막았는데, 머릿속은 온갖 말들로 가득 차 있던 거로 기억해요. ‘신중해야 한다. 이번 이닝만 잘 넘기자’ 이런 식으로 계속 되새겼어요.

요즘도 5회에 생각이 많아지곤 하나요?

처음보다는 줄긴 했어요. 작년에는 5회에 욕심을 갖던 게 다행히 좋은 결과로 이어졌는데, 점점 역효과가 나는 경우가 많아지더라고요. 잘 던지다가도 갑자기 와르르 무너지곤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5회에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팬의 마음을 저격하는 특급사수

올해 초에 유튜브 채널 ‘딩고 뮤직’의 인기 콘텐츠 ‘킬링보이스’를 찍었잖아요. 투수 4명이 같이 나갔는데 멤버 선정은 어떻게 한 건가요?

저희 팀 홍보팀에서 멤버를 골라서 나가겠냐고 물어봤는데, 누가 후보군에 있었는지는 안 알려줬어요. 그리고 저는 사실 처음에 거절했거든요. 살면서 누구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괜히 우스워 보일 거 같고, 흑역사로 남을 것 같은 거예요. 처음에는 엄두가 잘 안 났어요.

야구할 때의 긴장감과는 또 달랐을 거 같은데, 촬영 당시에 분위기는 어땠나요?

스튜디오에 갔는데 규모가 엄청나서 놀랐어요. 카메라도 많고, 무슨 조명이랑 음향 장비도 으리으리하고… 촬영 스태프도 많아서 ‘와 이거 장난 아니다’ 싶었어요. 영상 보시면 알겠지만, 노래하면서 제가 입을 엄청 작게 벌렸더라고요. 그래서 사람들이 막 인형이냐고 그랬어요. (웃음)

최근에 자주 듣는 곡이 있으면 추천해주세요.

운전하면서 노래를 듣곤 하는데요. 빅뱅의 ‘봄여름가을겨울’, 호미들의 ‘사이렌’, 그리고 BE’O(비오)의 ‘리무진’이요. 이렇게 세 곡을 자주 들어요. 집에서 야구장까지 출퇴근하는 거리가 가깝다 보니까, 이 세 곡 듣고 나면 어느새 주차까지 하고 있어요.

구단 유튜브에서 군대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죠. 그때 본인이 특급사수였다고 했는데, 영상 댓글에서 복무 당시 대대장님이 아니었다고 하던데요.

사격을 한 번만 하지는 않으니까요. 아마 대대장님이 보셨던 거는 야간 사격이었을 거에요. 항상 못 쐈던 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웃음) 그리고 저 분대장 출신이었어요! 자고로 분대장이라면 총을 못 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격할 때는 늘 집중해서 임했어요.

그 이후에 대대장님이랑 따로 연락한 적이 있나요?

자주는 못 해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어요. 대대장님이 몇 달에 한 번씩 제가 잘 던진 날 먼저 축하한다고 연락 주시기도 하고요. 반대로 제가 새해 인사드리거나 안부 여쭈어보기도 해요.

이 자리를 빌려 대대장님에게 간단하게 메시지 남겨볼까요?

대대장님. 제가 선발 등판하는 날 기회가 된다면 꼭 야구장에 한 번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시간이 맞는다면 꼭 연락해주세요. 제가 꼭 표 구해드려서 재밌게 경기 보고 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소중함을 잊지 않고

어느덧 프로에 처음 입단하고 10년이 지났어요. 지금까지의 야구 인생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소중함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제 인생에 우여곡절이 많았잖아요. 옛날에 삼성 2군에만 있을 때는 1군에서 뛴다는 것 자체가 그저 남 얘기인 줄만 알았어요. 사실 희망이라는 게 그렇잖아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아야 힘도 나고 의지가 생기는데, 어떻게 해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오히려 의욕이 떨어지더라고요. 삼성에서 제가 그랬어요. 야구를 한다는 거에 대한 감사함과 소중함도 모르고 맨날 쉬는 날만 기다리던 기억이 나요. 지금 보면 진짜 철이 없었죠. 그런데 막상 방출되고 나니까 프로팀에 몸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어요. 그리고 간신히 돌아온 후에는 제 주위에 있는 모든 일상에 한없이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그럼 앞으로의 10년은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사함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으려고 해요. 먼 길을 돌아온 만큼, 나태해지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선수로서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야구를 시작할 때 가졌던 꿈은 1군 선수가 되는 거였는데, 그건 지금 이루고 있죠. 그리고 그다음으로 가진 꿈은 힘이 닿을 때까지 최대한 야구를 오래 하는 거예요. 사실 이것도 결코 쉬운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계속 어리고 뛰어난 후배들이 나올 거고, 오랫동안 커리어를 이어간다는 게 결국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는 거잖아요. 저도 지금 1군에서 오래오래 뛰는 선배님들처럼 제 자리를 지켜가면서, 팬들 앞에서 꾸준히 플레이를 선보일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더그아웃 매거진> 공식 질문이에요. 윤대경에게 야구란?

‘집’이라고 하고 싶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릴 때부터 야구를 해와서 그런지, 만약 나중에 그만두더라도 결국엔 야구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거 같아요. 그래서 제겐 집 같은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팬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한화 이글스 투수 윤대경입니다. 요새 사회적 거리두기가 풀려서 지난 2년에 비해 진짜 많은 팬분이 야구장을 찾아주시는데, 덕분에 야구장 분위기가 핫합니다. 저희도 경기하며 설레고 흥분되는 감정을 크게 느껴요. 아무래도 더 많은 팬분이 오실수록 저희도 에너지가 더더욱 커집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응원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더 좋은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더그아웃 매거진 134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2년 134호 (6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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