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엔지니어들 - 한스 레드빙카 (1)

조회수 2021. 5. 18. 16:2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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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트라 섀시 콘셉트'의 기틀을 다진 천재

험난하기로 유명한 다카르 랠리에는 트럭 부문이 있다. 거대한 몸집의 대형 트럭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사막을 달리는 모습의 위압감은 남다르다. 특히 이 분야에는 우리에게 생소한 브랜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분위기가 색다르기도 하다. 지금까지 25년 이상 다카르 랠리에 참여했고, 1990년대에는 상위권에도 곧잘 오른 체코의 타트라(Tatra)도 그중 하나다.

출처: Buggyra Racing
2021 다카르 랠리에 출전해 달리고 있는 타트라 경주차

지금은 트럭과 군용차 생산에 집중하고 있는 타트라는 슈코다(Škoda)와 더불어 체코를 대표하는 자동차 브랜드 중 하나로, 과거에는 승용차도 생산했다. 특히 승용차 생산을 중단한 1990년대 말까지 공랭식 엔진과 뒤 엔진 뒷바퀴 굴림 구동계를 고집한 점이 독특했다. 자동차 역사에 밝은 애호가들에게는 폭스바겐 클래식 비틀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로 알려진 브랜드기도 하다.

그러나 타트라는 회사의 시작이 18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브랜드기도 하다. 19세기에 사업을 시작해 지금까지 자동차를 생산하고 있는 업체나 브랜드는 푸조, 오펠, 메르세데스-벤츠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타트라가 자동차 회사로서 자리를 잡고 독특한 모델과 기술을 만드는 데에는 한 인물이 핵심 역할을 했다. 한스 레드빙카(Hans Ledwinka)다. 

출처: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한스 레드빙카

유명 브랜드에서 기념비적 제품을 개발한 인물들이 주목받는 일은 당연하다. 그러나 타트라와 그 제품들은 자동차 역사에서 비교적 변방에 있어 주목받기 어렵다. 그런데도 엔지니어로서 레드빙카를 주목할 이유는 충분하다. 제품이나 브랜드보다는 그의 아이디어에 담긴 혁신성과 자동차 설계와 제품에 준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한스 레드빙카는 1878년 2월 14일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지금의 오스트리아) 빈 인근의 클로스터노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삼촌 밑에서 견습생으로 기계 관련 기술과 지식을 익히기 시작했다. 이후 빈에서 학업을 마치고 나서 1897년에 네셀스도르프(지금의 체코 코프르지브니체)에 있는 네셀스도르프 철도차량 제조에 제도사로 취직하면서 본격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레드빙카는 당시 여러 젊은 엔지니어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탈것인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회사 소유주에게 자동차 개발에 나설 것을 제안했다. 사주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회사 내에 소규모 자동차 개발 부서를 만들었다. 

출처: Pudelek vi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네셀스도르프 철도차량 제조가 만들었던 프레지던트(복제품)

부서 책임자는 당시 24세였던 에드문드 룸플러(Edmund Rumpler)였고, 18세였던 레드빙카는 그의 조수가 되었다. 룸플러는 이후 공기역학적 자동차 설계의 기틀을 다진 일로도 유명하지만, 스윙 액슬 서스펜션 구조의 특허를 내는 등 초기 자동차 기술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몇 가지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들었지만, 1902년에 관리자와의 불화 때문에 이직했다가 3년여 만에 다시 돌아왔다. 복귀한 직후 그는 엔진과 변속기 설계 개선을 시작으로 자동차 관련 기술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을 이어 나갔다. 레드빙카는 그곳에서 10여 년간 4기통 및 6기통 엔진 승용차를 개발하며 자동차 생산 부문 책임자가 되었다. 그 사이에 네셀스도르프 철도차량 제조는 본사를 빈으로 옮겼다.

그러나 그는 정부 지원금을 철도차량 부문 투자에 집중하고 자동차 부문을 포기하겠다는 회사 방침에 반발해, 1916년에 다시금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새롭게 둥지를 튼 곳은 빈의 슈타이어(Steyr)로, 그는 그곳에서 전 직장에서 마무리하지 못했던 대형 승용차 개발을 계속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네셀스도르프 차량 제조공장(회사 이름이 바뀌었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아울러 본사를 프라하로 옮기며 체코슬로바키아(지금의 슬로바키아)를 대표하는 산맥 이름인 타트라(Tatra)를 새로운 브랜드 이름으로 삼았다. 자동차 사업을 재개하기로 하면서 인재가 필요했던 타트라는 레드빙카를 다시 영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회사와 여러 차례 불화를 겪었던 그는 자신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 타트라와 레드빙카 사이의 협상은 1년 남짓 이어졌고, 결국 그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할 수 있었다. 슈타이어의 컨설턴트 자리를 지키면서 타트라의 자동차 설계 책임자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출처: Ondrej Ertl via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타트라 11

1921년에 타트라로 복귀한 레드빙카는 슈타이어에서 일할 때 설계를 시작한 차의 개발을 계속해, 1923년에 완성된 제품인 타트라 11(T11)을 내놓았다. 공랭식 수평대향 2기통 엔진으로부터 동력을 얻은 T11과 그 뒤를 이은 T12는 여러 혁신적 설계가 돋보였다. 특히 앞에 놓인 엔진과 변속기의 동력을 뒤 차축으로 전달하는 프로펠러 샤프트를 속이 빈 튜브 형태의 백본 안으로 통과시키는 백본 섀시를 선보였고, 뒤 차축은 스윙 액슬 독립 서스펜션 구조로 만들었다.

스윙 액슬 서스펜션은 레드빙카의 독창적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이미 1903년에 에드문트 룸플러가 특허를 냈던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엔진과 변속기를 직접 결합한 구조 역시 룸플러에 의해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설계를 구체화해 제품에 반영한 것은 레드빙카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이 기술과 아이디어를 백본 섀시와 결합한 것 역시 레드빙카의 아이디어였다. T11과 T12에서 가능성을 입증한 이 개념은 이후 이와 같은 기술 요소의 조합은 '타트라 섀시 콘셉트'로 불리며 여러 타트라 차에 이어졌다. 심지어 현재 생산 중인 타트라 트럭과 군용차에도 토크 튜브를 활용하는 백본 섀시 개념이 쓰이고 있다. 즉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타트라 기술의 바탕을 레드빙카가 완성한 셈이다.

레드빙카가 1920년대까지 했던 작업이 타트라라는 회사와 브랜드 관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라면, 이후 10여 년 사이에 그와 그가 만든 시험 제작차 V570과 양산차 77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은 여러 분야에서 자동차 업계를 자극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글 류청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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